문자가 발명된 후 글로 기록된 시대, 역사 시대 중 고대사에 대해 (3/1)
기원전 6세기~ 기원전 4세기 각 나라의 고대사
유럽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에 걸쳐서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흥망 하게 됩니다. 원주지가 중동 지역으로 추정되는 그리스
민족이 동부 지중해의 발칸 반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0세기의 일이었지만, 그들 특유의 도시국가가 완성된 것은
기원전 6세기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그리스 민족 가운데 도리아인은 반도의 남단에 있던 원주사회 미케네를 정복하고 스파르타라는
이름의 폴리스를 세웠습니다. 그 뒤에 이주해 온 이오니아인은 중부 해안에 아테네라는 도시국가를 건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폴리스를 형성하였습니다. 지중해를 무대로 가는 곳마다 식민도시를 건설한 아테네는 상, 공, 시민층이 일어나 대토지 소유자들의 귀족정치를 타도하고 가장 전형적인 고대 민주제를 완성하였습니다. 기원전 6세기 초에는 집정관 솔론이 일대
사회 개혁을 타도함으로써 노동 노예제가 발달하였고, 노예들은 참정권을 박탈당했습니다. 이리하여 기원전 6세기 말 클레이스테네스
의 민주 개혁으로 민주정치가 완성되고,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 민주정치의 전성기가 다가왔습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델레스 동맹을 결성했고, 안으로는 아테네 제국을 형성하고 안으로는 민주정치를 더욱 견고하게 하여 이른바 페리클레스
시대를 이루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의 문화도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문학이나 미술, 건축,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가장
그리스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후반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 아테네는 30여 년 간에
걸친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고, 그 뒤에는 스파르타가 패권을 장악하지만 얼마 못 가 테베에 그 패권을 넘겨주어 마침내
기원전 4세기 후반에 폴리스와 폴리스의 싸움으로 만성화되는 사태하에서 폴리스는 쇠퇴하게됩니다.
중국
이 시기의 중국은 대략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 초, 중기에 해당합니다. 춘추시대 후기에는 남방의 초·오·월 제후국이 황하 유역
중원 제국에 침입하여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또한 전국시대에는 위·진·제·연·초·한·조 의 7 강국을 중심으로 대세가 좌우되었습니다. 정치사적인 면에서 보면 이 시기에는 주 왕실이 유명무실하게 되고 봉건 제후국이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이 제후국 중
약소국은 강대국에 병합되어 갔습니다. 한편 제후국 내부에는 제후 가의 세력이 약화되고 가신이 실권을 장악하는 하극상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곧 전대 이래의 씨족적 질서가 붕괴되고 더 규모가 작은 가족 단위가 정치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것은 또한 생산력의 발전으로 종래의 생산방법이 새로이 발전된 생산력에 적응하지 못해 생긴 변화에 기인합니다. 기원전 6세기경 중국은 청동기 문화에서 철기문화의 단계로 전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후 농기구들은 철제로 바뀌게 됩니다. 또 이 시기에는 황하 유역의 제·조·위와 양쯔강 유역의 오에서 치수·관개사업이 활발히 전개, 제방 및 운하가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대사업을 위해서는 강대한 정치권력이 요구되고, 동시에 이런 대사업의 실행을 통해 정치권력을 강화했습니다. 사실 기원전
4세기 이후 전국시대 7 강국은 이때부터 중앙집권 제도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변혁에 따라 토지의 사유화와 조세제도가 확립
되었으며, 군사 및 관료제도를 중앙 집권화하였습니다. 당시 변혁으로 대표적인 것은 상앙에 의한 개혁이었습니다. 상술한 변혁은
기원전 3세기 말에 중국을 통일한 진의 중앙집권제 성립과 진한 사회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사회경제면에서 급격한 변화는
관념 형태에도 많은 발전을 초래하여 이 시기는 제자백가들에 의한 찬란한 문화의 황금시대를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페르시아
기원전 6세기 후반에 인더스강까지 이르는 오리엔트의 대영역을 정복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는 서쪽으로는 소아시아 반도 전역을 지배하여 연안의 그리스 여러 폴리스까지도 무차별적으로 예속시켰고, 에게해의 섬들까지도 지배하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침입에
즉시 이오니아의 폴리스가 반항하였고, 이것을 페르시아의 사트라프가 무력 진압한 것이 소위 제1차 전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때까지 페르시아는 아직 그리스 본토에 진공 할 의도는 없었고, 트라키아 방면을 보안하려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이오니아는 아테네 등 본토의 원조에 의지하여 반항을 그치지 않았고 2년 후 또 다시 적은 대군을 몰아 내습하여 이번에는 에게해를 횡단해 바로 본토에
상륙하여 제2차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결전장은 아티카 해안의 마라톤 평원이었으며, 이를 요격한 에테네 중무장변의 분전은 맹렬해
스파르타의 원조 없이 마침내 적의 대군을 상률 지점으로 격퇴시켰습니다. 페르시아의 기병, 궁병에 대해 잘 통제된 밀집 보병대의
백병전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가를 철저히 보여준 싸움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측에서는 더욱이 대규모의 재차 원정을 기도하였지만, 이후 사트라프의 반란, 왕의 교체 등으로 인해 10년 간 원정을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이에 에테네는 시간을 활용해서 테미스토클레스의 노력으로 대함대를 건조하는 등 충분한 준비를 하고 기다렸습니다. 기원전 480년 대왕 크세르크세스가 직접 출전해 제3차 전쟁이 개막되었습니다. 대군은 육로를 우회하여 북쪽에서 그리스에
침입, 테르모필레의 험준한 곳을 수비하고 있던 스파르타군은 선전했으나 왕을 비롯한 전원이 전멸하였습니다. 마침내 아테네도 점령,
아크로폴리스도 불타버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뜻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나게되는데, 1천 척에 이르는 페르시아 대함대가 하필이면
살라미스 해협의 좁은 수로에서 그리스 함대의 방해에 의해 대혼란을 일으켜 궤멸해 버린 것이었습니다.(살라미스 해전)
정신을 잃어버린 적왕이 그 때문에 작전을 포기하여 이 해전은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육지에서도 기원전 479년의
폴리타이아이 결전에서 페르시아군은 완패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동서 전쟁은 그리스 연합의 대승리로 끝이 나게 됩니다.
델로스 동맹
페르시아의 재습격에 대비할 것을 명분으로 하여 기원전 477년의 봄, 아테네를 맹주로 이오니아나 아이올리스, 에게해의 여러 섬에
있는 폴리스가 가맹하여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 가맹 각국은 군함과 수병을 제공하거나 공부금으로 대납을
하는 등의 의무를 졌습니다. 많은 가맹국은 안일을 구하여 후자를 택했으므로 결국 아테네가 이들 동맹군 자금을 사용하여 군비를
부담하여 아테네의 무력은 한층 더 강대해졌습니다. 공부금의 사정이나 징수하는 '동맹 재무위원'이 아테네 시민에서만 선출하도록
되어 있던 예에서도 볼 수 있듯 원래 아테네가 주도하는 체제였지만 처음에는 명칭대로 에게해 중앙의 델로스섬에 있던 동맹금고를
기원전 454년에 아테네에 옮기고서는 아테네는 이를 더욱 노골적으로 사유화하였습니다.
기원전 449년 봄 '카리아스의 평화'가 성립하여 페르시아 전쟁이 정식으로 종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끌어가는 아테네에 의해
동맹은 해산되지 않았고, 동맹 기금이 아테네 시민의 구휼이나 여러 공무 일당, 국영 건축에 유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시에 동맹
각국에 대한 내정 간섭이나 강제, 재판 자치권의 침해 등 동맹은 아테네 제국주의의 도구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안보 체제'에서 이탈하려는 폴리스가 차츰 증가하고,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반 아테네적인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그것에 얽히어,
양자의 대립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인도
기원전 7세기경 갠지스강 유역에는 크고 작은 도시국가가 난립하여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기원전 6세기가 되자 군주제를 발달시킨
코살라와 마가다의 양국이 강대하게 되어 인근의 나라들을 병합해 갔습니다. 그래서 기원전 5세기 초부터 양국은 심한 싸움을 되풀이
했으나, 결국 마가다가 승리하면서 갠지스강 유역 일대의 통일을 실현시켜 그 뒤 몇 세기에 걸쳐 북인도의 역사에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됩니다. 이 지방의 정치적 사건은 서사시 외에도 불교나 자이나교의 경전을 통해 상당히 자세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상면에서는, 브라만교의 제식 중심적인 생활 방식에 반대하고 내면적인 사색을 중시하는 일파에 의하여 우파니샤드 철학이 나와,
후대 인도 사상사의 전개를 규정지어 주었습니다. 당대 갠지스강 유역의 도시국가에서 활약하고 있던 것은 무사계급(크샤트리아)와
상인계급(바이샤)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다나 브라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카스트 제도에 구애됨이 없이 행동하며 살아갔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분위기가 있는 여러 도시에서 새로운 사상가들이 모여 자기 사상을 설유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은 불교 경전에
62견, 6사외도 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사상가 중에서도 고타마 싯다르타와 바르다마나(마하비라)가 유력하고, 그들이
창시한 불교와 자이나교는 후의 인도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불교와 자이나교의 발달로 크샤트리아 계급의 지위가 높아지
면서 인도 사회는 크게 변천하게 됩니다. 특히 불교의 평등사상을 정치에 적용시킨 것은 마우리아 왕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