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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를 아울렀던 거대한 제국, 고대 로마에 대해서

by 노란 오리 2023. 8. 29.

 

 

고대 로마, 지중해를 아우르는 제국이 되기까지

기원전 8세기경 이탈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이룬 고대 문명으로

고대 그리스, 오리엔트, 셈족, 서유럽 켈트, 게르만 등 문화의 용광로였습니다. 또한 고대 로마의 문화와 법,

군사 체제는 서구 유럽, 동구권을 막론하고 현대 사회의 법, 정치, 전쟁, 예술, 건축 같은 분야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고대 로마는 수백 년 동안 확장을 거듭하여 왕정에서 과두 공화정으로, 또 점차 제정으로 변모했습니다.

기원전 7세기경 로마는 지역 중심지로 번영하던 도시 국가로 왕정 체제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509년에는 왕정이 무너지고 귀족과 평민 계급이 공화정을 세우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로마인들은 평민과 귀족 간에 200여 년 이상 투쟁과 타협을 반복하며 로마 특유의 과두정 체제를 점진적으로 이루었습니다.

내부의 신분 투쟁 가운데도 로마는 외적들을 복속시키며 마침내 기원전 272년경 게누아(제노바)에서 이탈리아 최남단까지

거대한 동맹 체제를 수립하였고, 로마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150여 년간 여러 정복 전쟁을 통해

갈리아, 카르타고 등을 정복하고 지중해 전역을 제패했습니다.

 

 

 

 

 

고대 로마 문명의 역사적 배경

기원전 약 10세기를 전후로 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정착하여 살던 여러 부족들은 약 2~300년에 걸쳐서

서로 교류를 하거나 전쟁을 벌이는 등의 활동을 하며 융화와 추방을 반복하였습니다. 고대 로마 문명의 초기 역사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8세기 경 라티움에는 라티움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이 땅은 티베리스 강 이남 중부 이탈리아 서해안에

자리잡아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평야였습니다. 이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에 인도-유럽어족이 

이탈리아 반도 곳곳에 흩어질 때 형성된 일개 이탈리아어파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은 농경과 목축으로 식을 해결했을 것이고,

 손으로 짠 투박한 옷을 입었고,  조야한 도자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이들의 집은 화로와 대문 밖에 없는 원형 나무

오두막이었습니다. 몇몇 보석 장신구와 청동 혹은 철 연장을 제외하면 이들은 해외에서 물건을 수입해서 쓰지 않고

거의 대부분 수작업을 통해 지내왔습니다. 

이탈리아이 대다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뒤쳐진 상태였는데, 이 곳에 복합 문명이 발달하게끔 깊은 영향을 준

두 집단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는 라티움에서 테베레 강을 건너 에트루리아에 정착한 에트루리아인들이었고,

다른 한 잡단은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후 이탈리아를 통일하게 될 도시 로마의 발전에 있어 각별히 중요한 민족으로 여겨집니다.

 

 

 

 

로마 지도 - Bing images

 

 

 

고대 로마 문명의 사회 모습

수도 로마는 당대 최대의 도시로 인구는 백만 명에 이르렀으며 이 인구수는 19세기에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런던의 인구와 맞먹습니다. 최대 추정치는 140만, 최소 추정치는 45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공공 장소는 발걸음 소리와 마차 바퀴가 덜걱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운 탓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낮에는 

도상에 마차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금한 바도 있습니다. 역사가의 추정에 따르면 고대 로마의 인구 20% 정도가

도심지에 살았으며, 1만 명 이상이 군사 정착촌에 거주하여 전근대 기준으로 매우 높은 도시화율을 보였습니다.

대부분의 도심지에는 포룸과 신전과 비슷한 양식의 더 작은 건물들이 많이 분포했었습니다.

 

 

 

 

고대 로마의 계급

로마 사회는 대단히 위계적이었으며 계급을 의식하는 사회였습니다. 최하층은 노예, 그 위로는 해방노예라고 불리는 피 해방인,

 위에는 자유 시민이 있었습니다. 자유 시민은 또 일정한 계층으로 분류되었는데, 로마 역사 초기 계층은 창건을 이끈 100명의

가부장 출신의 귀족과 나머지 평민으로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공화정 시대에 이 구분의 중요성은 점차 떨어졌고,

일부 평민 가문이 부유해서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으며 귀족 계급이 몰락하는 등의 이유도 존재했습니다. 귀족이건 평민이건

누구나 자신의 가족에서 집정관에 오르면 신귀족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가령 가이우스 마리우스나 키케로는 

이런 유형의 신인으로 이들의 후손은 귀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혈통 귀족인 경우 지속적으로 상당한 명성을 유지했고,

여러 종교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자격자는 공화정 말기까지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습니다.

또한, 공화정 시대에 투표권의 비중도 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선거 지역구격인 "트리부스"에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부유한 계층의 트리부스는 재산 수준이 낮은 트리부스보다 인원 수가 적었고,

무산자 계층 전체에는 트리부스가 겨우 하나밖에 할당되지 않았습니다. 투표는 계급 순서에 따라 이루어졌고,

전체 트리부스의 과반에 이르면 투표가 종결되는 탓에 가난한 계급은 아예 투표를 못하는 경우도 빈번했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 가족의 모습

로마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가족이었습니다. 가족의 개념에는 가부장과 아내, 자녀, 다른 친척이 포함되었습니다.

상류층에서는 노예와 하인도 가족의 일부를 이루었습니다. 가부장은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해 절대권을 행사했고,

결혼과 이혼을 결정할 수 있었으며, 자손들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도 가능했습니다. 심지어는 생사 여탈권까지

존재하는 등 가부장의 힘은 가족 내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고대 로마에서 결혼은 특히상류층 사이에서는 낭만적인 결합이기보다는 경제적, 정치적 결합으로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가부장은 보통딸이 12살에서 14살 사이 나이일 때 사위를 구했습니다. 신랑은 대부분 신부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상류층에서는여자가 어린 나이에 결혼한 데 반해, 하류층 여성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결혼했다고 합니다.

 

 

로마 제국의 교육 방법

공화정 초기 로마에는 공립 학교가 없던 탓에 소년들은 부모나 노예 교사에게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시대 교육의 일차적인 목적은 젊은사람들에게 농업, 전쟁, 로마의 전통, 공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린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종교, 정치 활동을 하면서 일찍이 사회 생활을 다양하게 익혔습니다.

귀족 자제는 16세 나이에 유력 정치인 밑에서 정치를 배우고, 17세부터 군대에서도 활동을 하며 학습을 합니다.

기원전 3세기에 헬리니즘 나라를 정복하면서 그리스 문화가 유입되어 교육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지만,

그리스의 교육 방식과는 여전히 달랐습니다. 부모가 여력이 있으면 7살 나이의 소년과 일부 소녀들을 집 밖

사립학교로 보냈습니다. 이들이 11살이 될 때까지 교사가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법, 때론 그리스어와 로마 문학을

알려주며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16살이 되면 몇몇 학생은 수사학 학교에 가기도 합니다. 

수사학 학교의 교육 수준은 법조인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준비했으며, 이들은 로마 법을 암기해야 했습니다.

학생들은 종교 축제나 장날 외에는 매일 학교에 갔으며, 여름 방학도 존재했습니다.

 

 

 

 

17세기 유럽의 근간을 이룬 고대 로마법

고대 로마의 법리와 사법은 12표법에서 시작해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로마법대전으로 이어집니다. 로마법은

동로마 제국 시대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존속했으며, 서유럽 법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넓은 의미로 볼 때로마법은 17세기 말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적용되었습니다. 고대 로마법의 주된 부분은 유스티니아누스의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된대로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이 있습니다.시민법은 로마 시민에게 적용되는 주요 보통법입니다. 도시 법무관은 시민들의 송사에 대해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민법은 외국인들이나 외국인과 로마 시민 사이의 송사에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연법은 일반적인 의미의 자연법을 포함하며, 외국인과 로마 시민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입니다.

 

 

 

 

 

지중해를 아우를 수 있었던 고대 로마의 군사 체제

초기 로마의 군대는 추첨에 의한 징병제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국가 로마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지원제로 바뀌었고,마침 고도성장기의 로마에서 증가하고 있었던 실업자의 구제책으로 환영받았습니다.로마가 제정으로 바뀌면서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으로 엄청나게 커져 있던 군대의 규모를 줄이고,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편성하던 방식을 바꿔 상비군 제도로 개편했습니다.

이 제정 로마의 상비군은 국경 바깥의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부분 국경 부근에 배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