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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근대를 연결하는 시기, 근세사에 대해

by 노란 오리 2023. 9. 9.

근세사에 대해

 

근세사에 대해

서양의 중세와 근대의 사이의 시기로 불리고 있으며, 이를 다시 근세와 근대로 나누기도 합니다.

근대는 대개 영국 산업 혁명 이후부터 20세기 초반까지를 가리키며, 근세는 그 이전을 일컫는 말입니다.

 

 

 

유럽의 근세

영국, 왕권을 둘러싼 전쟁

프랑스와 영국사이에서 백년전쟁이 일어났다. 백년전쟁은 단순히 왕위 계승이나 플랑드르
쟁탈을 에어싼 100년 간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프랑스 출신 영국 왕실이 프랑스 국내에

갖고 있는 봉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되풀이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고질적인 분쟁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양국이 봉건제도를 극복하고 국가의 민족적 통일을

성취하는 때에 해당하며 영국·프랑스의 봉건적 제세력을 많이 동원함으로써,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는

국내 봉건 제후 내부의 투쟁이기도 하였으며, 제후의 몰락과 왕권의 신장 및 국민 의식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7세, 루이 11세, 샤를 8세에 의한 전후 재건을 통해 

왕권이 정비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전후 또다시 제후, 기사들을 휘말아버린 30년에 걸친 내전인 장미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튜더 왕조의 헨리 7세에 의해 영국 절대주의가 등장하였습니다.

 

르네상스

영국과 프랑스에 왕권이 신장되고 있던 시대에 독일과 함께 이탈리아는 분열 상태가 진행되던 상황이었습니다.

남부에서 나폴리 왕국, 중부에서 로마 교황령, 북부에서는 십자군 이후 동방 무역으로 거둔 도시가

주변 농촌까지도 지배하에 두고 도시 국가로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등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공화국을 무대로 부유한 상인층을 기수로 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전개되었습니다.

이탈리아는 당시 동방 무역을 통해서 이슬람의 문화나 고대와 고전의 학문·예술 등이 유입되고 있었고,

고대 그리스·로마의 인간이 대치되어 피안적이 아니고 차안적·개인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생의 약동에

찬 문화가 시민 계급에 의해 이곳에서 창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단테는 신곡을 써 르네상스의 선구가 되었고,

페트라르카, 조반니 보카치오가 문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한편 르네상스 예술은 

조토 디본도네에서 시작해 보티첼리를 거쳐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등이 출현하여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이즈음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써서 분열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통일을 호소하였습니다.

 

 

종교 개혁

독일에서는 13,14세기 이래 영방국가 체제가 더욱 진전되고 성속의 제후나 도시는 자립하는 등,

국내의 분열은 점점 심해져갔습니다. 쇠퇴해 가고 있던 교황권은 국가적 통일의 약한 부분에 

기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에 의한 면죄부의 판매가 독일을 목표로 한 것도 그와 같은

사정에 의하고 있습니다. 이 면죄부 판매에 반대한 루터의 95개 조항의 논제 발표와 함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봉건사회의 해체가 늦어진 독일에서도 농민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고 해방을 요구하는

농민들은 격렬한 농민전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에게 격려되어 태세를 정비한 제후들은 이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더욱이 이들은 종교개혁을 정치 대립에 이용하였습니다. 1529년의 슈바이엘 국회에서

황제에게 항의한 루터파의 제후들은 이듬해 동맹을 맺어 황제와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고,

슈말칼덴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제후나 도시에게 루터파 신앙을 인정함으로써

영방 지배 체제를 종교면에서 확인한 것에 불과했고, 독일은 결국 영방국가 체제가 강화되면서

국가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아시아의 근세

중국

약 1세기에 걸친 이민족 왕조인 원의 지배하에 정치 사회적으로 가혹한 민족 차별을 받았던 한족은 14세기 중엽,

원 왕조의 내부 분열에 의한 지배력의 약화에 편승하여 민족적 반항을 개시했습니다. 그 반항의 중심이 된 것은

홍건군이라 자처하는 백련교도였는데, 이 홍건군이 참가한 빈농 출신의 주원장이 마침내 두각을 나타내어

양쯔강 하류 지역의 경제력을 수중에 넣고 군웅을 굴복시켜 명나라를 건국하고 제위에 올라, 원을 북방으로

쫓아 중국을 통일시켰습니다. 그는 수도를 남경으로 하고 정치 기구의 개혁과 농촌 대책을 강력히 추진하여

황제 독재제를 주축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홍무제가 내정에 중점을 둔 데 반해서 적손인 건문제를 물리치고 즉위한 영락제는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몽골 원정을 반복하고 남해 원정을 하는 등 대외 정책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황제에는 범용한 자와

연소자가 많아서 관료의 당쟁이나 환관의 전횡이 격심해졌습니다. 15세기에는 북방에서 서몽골의

오이라트가 침입하여 명 왕조에 타격을 가하고 안으로는 농민폭동인 등무칠의 난이 일어나서 

사회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장거정이 나와 정치 개혁을 실시하여 재정을 바로잡았으나 

그의 사후 다시 정치는 흔들리게 되면서 동림과 비동림의 당쟁이 격화되고 환관이 세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사태가 됩니다.

 

 

한국

한국의 경우 조선의 건국인 1392년에서 흥선대원군 집권기인 1863년까지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일본

교토를 초토화한 오닌 분메이의 난이 종식한 1477년부터, 기나이는 오다씨, 그리고 주고쿠은 모리씨,

도고쿠는 호조씨에 의해서 거의 통일되는 16세기의 70년대에 이르는 약 1세기를 센고쿠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전반인 약 50년 간은 오닌의 난 이후 교토에서 귀국한 슈고 다이묘가 일족, 가신 및

고쿠진들과 항쟁하여 급속도로 몰락하는 과정이며, 또한 후반의 50년은 슈고 다이묘로부터 하극상에

의해서 권력을 빼앗은 신흥 센고쿠 다이묘에 의한 통일을 위한 쟁패의 과정입니다. 센고쿠 시대는

일본 역사상 가장 변동이 심했던 시대의 하나인데, 이와 같은 변동은 무로마치 시대 이래 전진해 온

사회의 생산력 발전에 대응할 수 없게 된 낡은 정치와 경제 체제를 급속도로 붕괴시키고,

새롭고 강력한 지배체제로 재편성한다는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센고쿠 다이묘는 일족이나 고쿠진을 

가신으로 삼았고, 나아가 촌락의 토착 무사를 군사 조직화하여 본성 - 지성을 주축으로 하는

정치, 군사 체제를 강화시켰습니다. 가신이나 농민, 수공업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법도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항상 영토 내의 생산력에 비해서 과대한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팽창책을 취하고,

평화적, 군사적 수단에 의한 영토 확장을 계속하였습니다. 한편에서는 부국 강병책을 위한 영국 내의

산업 발전에 주력하여 용수나 축제 등의 토목공사와 병행하여 경지의 개발이 추진되고,

광산개발, 교통제도가 정비되었습니다. 각지의 6재시가 발달하여 대체로 상, 공, 농업 등의

산업, 경제면에서 활기가 있는 시대였습니다.

 

 

동남아시아

이 시기 포르투갈, 에스파냐가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였습니다. 한편 그들을 맞는 동남아시아의 배경은,

반도에서 안정된 정권을 갖춘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 캄보디아는 이 왕조에 침식당해 마침내 앙코르를

버리고 프놈펜에 주심을 옮기게 되면서 완전히 힘을 잃게 됩니다. 말라카 해협에는 14세기말에

말라카 왕국이 형성되면서 동남아시아에서 최초의 이슬람교국이 되었으나 얼마 못 가 포르투갈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15, 16세기의 도서 지역은 통일이 결여된 시기여서 자바 북부의 데마크나 수마트라

서북 연안의 아츄 등 항구가 번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