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 (초기 ·성기 ·후기)
중세는 유럽역사에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던 5세기부터 르네상스와 더불어 근세사가 시작되기전
까지의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시기입니다. 로망스어군의 역사학자들은 중세를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였습니다. 독일어권과
영어권의 학자들은 일반으로 중세를 초기 · 성기 · 후기의 세 시대로 나누어 설명하곤 합니다. 벨기에의 역사가인 앙리 피렌과
네덜란드의 역사가인 요한 하위징아는 20세기 초에 다음 세 시대 구분을 대중화하였습니다.
중세 초기
10세기 이래 각지에 이동한 게르만족은 앵글로색슨족이나 서고트족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프랑크 왕국이나 동로마 제국의 치하에
흡수되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카를 마르텔의 사라센 제국의 격퇴로 궁재의 힘이 강대해졌으나, 8세기에는 피핀에 의해서
카롤링거 왕조가 성립되었습니다. 이 무렵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황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시작했으나, 교황 또한 그리스 교회와 대항
하기 위해 세속 군주와의 유대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프랑크 왕국은 봉건제의 기반이 성립되자마자 중세에 교황과 군주들과의
제휴, 상호 이용이 전개되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번영의 뒤를 이어서 6세기말, 슬라브족의 이주와 국내의 반란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7세기 초부터 이 제국은 둔전병과 군관구 제도 등을 채용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여 7세기말 사라센군의 침입을 방위했습니다. 또한 8세기 초에는 우상숭배 문제를 계기로 하여 , 로마 교회와 대립하기 시작하였고, 제국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리스적 국가로서의 특색을 강하게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중세 성기
이 시기에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가톨릭 교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종교계의 지배자인 가톨릭 교황의 권력이 강대해졌고, 이에
세속계의 최고 권력자인 신성 로마 황제와의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성직의 서임을 둘러싸고 법황 그레고리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에 벌어졌던 정면충돌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 충돌로 인해 헨리 4세는 카노사에서 그레고리 7세에게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교황권이 절대적인 것으로 된 반면에 속세의 황제권은 점차 쇠퇴하였고, 강대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권 국가가 회교권 국가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 십자군의 원정으로 나타났습니다. 회교도들에게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과 동로마 구원의 명분을 가졌던 십자군 원정은 1296년에서 1300년 동안 3번에 걸쳐 단행되었습니다. 이 십자군
원정은 후세의 정치·경제·교통 등 여러 면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러한 여러 영향은 중세 대학은 볼로냐 대학, 파리 대학,
옥스퍼드 대학 등이 끼친 여러 방면의 영향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중세 후기
유럽에서는 십자군 운동 이후 그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의 상업 도시가 레반트 무역을 독점하고 한자 도시 동맹과 더불어 원거리 무역과
도시발달을 추진하였습니다. 화폐 경제의 농촌 침투는 지대의 금납화, 직영지의 해방을 비롯한 장원제의 해체를 촉진하는 한편, 도시에서는 귀족화한 상인의 지배를 타파하는 길드 혁명이 진행되어 공장제 수공업화가 진전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군 운동의
실패로 실추된 교환권이나 황제권을 대신하여 왕권이 강화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관료제와 상비군을 정비하고 사치를 하기
위해 과세 증가가 기도되었으나 이를 견제하려는 도시인의 정치적 발언권과 충돌하게 되면서 마침내 성직귀족, 세속귀족, 도시민을
대표하는 영국의 자문의회나 프랑스의 삼부회 같은 신분제 의회를 가지게 되어 중세 국가는 신분제 국가로 변모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왕권강화가 추진되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백년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프랑스 왕에 의하여
아비뇽에 유폐되는가 하면, 교회가 분열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교권의 쇠퇴와 왕권의 강화는 각국의 사정에 따라 그 성격도
달랐습니다. 귀족 세력이 강했던 독일은 연방제 국가를 이루었고, 상업 자본이 축적되었던 이탈리아에서는 데스포트와 같은
전제군주제가 실현되었으며,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이슬람 세력의 대결의 필요성으로 그리스도교국을 건설하였습니다. 한편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막으며 서유럽의 방패가 되었던 동로마 제국은 재흥된 뒤에도 계속적인 위협하에서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세사의 학문
중세 유럽에서 최초의 주목할 만한 연구 활동의 부흥은 카롤루스 대제가 피사의 피에트로나 알퀸의 조언을 받아 당시 고대의 철학을
본존하고 있었던 잉글랜드나 아일랜드의 학자를 초빙하고, 787년의 칙령에 의해서 제국 내의 모든 수도원에 학교를 병설시켰을 무렵
시작합니다. 이러한 학교는 스콜라 철학의 이름의 유래가 되어 중세의 연구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철학적 활동 중엔
고대의 저작을 필사하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중세 성기의 스콜라 철학은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의 철학자, 신학자, 주교인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안셀무스는 신의 존재의 존재론적인 증명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13세기 초기에는 그리스 철학 부흥이 절정에
이르러, 버스의 아데 라드는 시칠리아나 아랍 세계를 여행하며 천문학이나 수학 문헌을 번역하였으며 그중엔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의 첫 완역도 포함됩니다. 13세기 중반의 모에르베케의 비렘에 의한 그리스 철학의 문헌의 번역, 편집은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를 명확히 묘사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중세사의 과학
15세기부터 17세기 중엽에 걸친 크리스트교도 학자의 제일 첫째의 학문 활동은 아라비아어를 배워서 아라비아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는데, 뛰어난 번역가가 뒤를 이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에스파냐는 그 지리적 관계에서 회교도와 크리스트교도
와의 접촉점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톨레도는 회교도에 둘러싸인 크리스트교국이라는 지위에 있었는데, 톨레도의 대사교는 자기
교회 내에 번역소를 두고, 많은 학자를 모아서 번역사업에 종사케 하였습니다. 가장 뛰어난 번역자로 유명한 크레모나의 제럴드는
처음에 이 번역소의 조수였습니다. 그는 아라비어역의 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갈레노스, 히포크라테스 등의
92권의 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17세기의 중엽까지는 아라비아어는 과학문헌으로 중요한 것은 모두
라틴어로 옮겨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