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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가 발명된 시대, 역사 시대 중 고대사(3/2)

by 노란 오리 2023. 9. 4.

기원전 3세기 ~ 1세기  고대사

기원전의 마지막 3세기간은, 이미 통일을 이룩한 오리엔트 세계에 이어서 구대륙의 다른 지역에 있어서도 잇따라 대통일 국가의 

성립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 동안 전개된 대규모의 정복 전쟁과 거대한 국가의 출현은, 각지역에 있어서 사회의 현저한 변동과

새로운 체제의 성립을 촉진시켰습니다. 또한 그에 수반하여 통상로는 더욱 확대되어 고대 세계의 넓은 범위에 걸쳐서 왕성하게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서방에 있어서는 기원전 4세기 후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 대신하여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이 나타나, 동지중해에서 서아시아까지를 지배하였으나, 대왕의 사후 그 제국은 '후계자'들에 의해 분할되면서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프톨레메우스 왕조 이집트,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헬레니즘 국가들이 성립하였습니다.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338년 케로네아 전투에서 승리한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는 중앙부의 코린트에 스파르타를 제외한 전역, 그리고 여러

섬들의 모든 폴리스에서 대표를 소집해서 폴리스의 독립, 자유, 불가침, 정체, 사유 재산, 대차 관계의 현상태 유지를 약속하고 참가한

모든 폴리스의 연맹을 결성하여, 스스로 동맹의 외부에서 연맹 의결 사항의 집행자가 되었습니다. 다음 해 기원전 337년 제2회 총회

에서 연맹의 대 페르시아 보복전을 결의, 동시에 마케도니아 왕은 각 폴리스가 분담 파견한 연맹군 전체의 절대 통수권자로 임명

되었습니다. 다음해 봄 선견 부대를 소아시아로 진군시켰으나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되어 알렉산드로스 3세가 왕위에 등극하였습니다.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은 알렉산서 휘하의 마케도니아·그리스 연맹군 3만 5천 명은 기원전 334년 이른 봄 소아시아에 출격하였습니다.

최초의 전투인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거의 전사할 뻔한 위기를 겪었고, 다음해 가을 이수스의 결전에서 처음으로 

적왕 다리우스 3세와 상면하였습니다. 양군 모두 정찰대를 내지 않았고 한눈에 볼 수 없는 험로에서 갑자기 맞부딪쳤기 때문에

대병력이 도리어 혼란을 겪었습니다. 적은 혼란중에 피해 달아났으며 왕후와 왕자들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를 

계속 쫓지 않고 페니키아 해안을 하나하나 진압하여 기원전 332년에 이집트를 점령하고, 전 331년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습니다.

기원전 331년 이른 봄, 다리우스와 자웅을 다투려고 다시 북상, 10월 1일 가우가멜라에서 결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다음 해 겨울, 다리우스의 페르세폴리스 궁전에 불을 질러 전쟁이 완료했음을 증거로 삼고, 적의 수도 엑바타나에 입성하여 연맹군을

해산시켰습니다.

 

 

고대 로마

기원전 6세기 말 왕을 에트루리아로 쫓아버린 로마 귀족들은 공화정을 수립하였습니다. 귀족 지베는 평민의 투쟁에 의해 여러 차례

위기에 쳐했었지만, 원로원의 지도하에 타협하여 결국은 귀족 지배를 강화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한편 밖으로 눈을 돌리면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에 에트루리아의 세력은 여전히 강하였으며, 아펜니노 산맥의 아에퀴인, 볼스키인의 평지 진출도 격심하였

습니다. 기원전 5세기의 로마는 방어전에 힘쓰다가 5세기 말에 이르러 공세로 전환했으니 그 직후 갈리아인으로부터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칼리아인으로부터의 타격과 신분 투쟁을 수습하게 되자 기원전 4세기 후반에 라티움의 도시들과 싸워 이들을 굴복시켰으나 단순한 종속은 아니었습니다. 로마가 삼니움 에트루리아, 남이탈리아에 세력을 확장할 때 라티움의 도시들이 공동 출병하고,

정복한 도시들로부터 빼앗은 영역에, 역시 공동으로 '라틴인 식민시'를 세웠습니다.

 

제 1차 포에니 전쟁에 의해서 최초의 해외령인 시칠리아섬을 얻음으로써 로마의 국정이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때문에 몇 번이나 위기에 직면한 제2차 포에니전쟁을 치르고 난 뒤부터 본격적인 지중해 진출이 시작됩니다.

마케도니아를 격파하고 그리스를 보호함으로써 동지중해를 석권했지만 로마의 내부에는 위험한 조건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전쟁 노예의 유입과 토지 겸병에 의한 대농장 경영이 진전하여, 로마를 뒷받침하여 왔던 중장보병인 자유농민이 격감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싸고 지배층 사이에서 의견이 대립한 것이었습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사회 문제에는

유효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내란을 유발하였습니다.

 

 

 

오리엔트

유목민이었던 파르티아인은 세력이 늘어나 이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훗날 예술, 종교 등의 면에서 이란적인 특색이 짙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혼합적 성격이 파르티아 문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파르티아 시대는 훗날의 사산조 시대에 이란 문화가 개화하기까지의 서아시아에서의 과도적인 한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왕국 세력의 후퇴와 함께, 동방 변경에서는 먼저 박트리아의 디오도토스가 분리하였고, 이어 기원전

247년 이란계 유목민 출신의 아르사케스가 독립하여 파르티아 지방을 지배했습니다. 이것이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왕국의 출발

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후 전사하게 되고, 아우인 티리다테스가 뒤를 이어 서방에 영토를 확장하여 도읍을 헤가톰필로 두었습니다.

그 후 미트리다테스 1세 시대에 파르티아의 대발전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고, 티그리스강 동쪽 연안에 파르티아

후기의 수도 크테시폰을 건설하였습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동방에서는 박트리아 왕국이 멸망하여 대월지로 바뀌었고, 서방에서는 로마의 진출이 현저해졌습니다. 파르티아에서는 미트리다테스 2세가 즉위하여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에까지 세력을 뻗쳐서 전성시대를 이어갔습니다. 그가 죽은 후 국내에 분쟁이 빈발하게 되고, 또한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둘러싼 로마와의 대립으로 고투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53년의 카를라에 전쟁에서는 크라우스를 전사하게 하였으며 기원전 36년에는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대패시켰습니다. 로마의 제정을 시작한 아우구스투스는 화평을 희망하여 이후 약 1세기 동안은 파르티아와 로마의 관계가 비교적 평온했습니다.

 

 

인도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5세기에 걸쳐 갠지스강 유역은 샤이슈나가 왕조가 지배하는 마가다국에 의해 통일되었습니다. 그 후 기원전

4세기 초에 샤이슈나가 왕조가 무너지고 난다 왕조로 바뀌었으나 마가다국의 번영은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한편 인더스강 유역은

기원전 518년경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에 정복되어 이후 페르시아 제국의 속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전해진 페르시아 문화는 다시 동쪽의 갠지스강 유역에서 번영하고 있던 인도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됩니다.

아케메네스 왕조를 무너뜨린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27년부터 기원전 325년에 걸쳐서 인더스강 유역에 침입하여 그 후 얼마 동안

이 지방은 그리스 세력권에 들게 됩니다.

 

갠지스, 인더스의 두 강에 걸친 통일제국을 건설한 것은 마우리아 왕조의 창시자인 찬드라굽타입니다. 그는 마가다국의 지배권을 

난다 왕조로부터 빼앗자 즉시 서북 인도의 그리스 세력을 일소하고, 이어 남부 데칸 지방의 정복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마우리아 왕조는 마우리아 제국을 중앙 직할령과 속주로 나눴고, 각 주에는 중앙에서 왕자나 대신을 파견하여 통치를 담당하였습니다.

통일제국의 출현에 의해서 국내 교통이 원활해지게 되고, 경제·사회·문화의 각 방면에 있어서 전국적인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문화적 후진 지대였던 남부인도는 이 시대에 북쪽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문화 발달이 촉진되어 마우리아 제국 쇠퇴 후에 있어서

안드라 왕조의 번영을 보게 됩니다.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했던 이 왕조도 아소카의 죽음 후 쇠퇴의 길로 향하게 되면서,

기원전 187년경 슝가 왕조의 창시자인 푸샤미트라에 의해 무너지고 인도는 다시 정치적 분열의 시대로 들어서게 됩니다.